개선문-레마르크
10.
인간은 독립해 있어야 한다. 무슨 일이든 처음에는 약간 의존하는 것에서 일이 벌어진다. 처음엔 그것을 모르고 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벌써 타성이라는 그물에 꼼짝없이 걸려 있는 것이다. 타성- 이것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붙어 있다. 사랑도 그것의 하나이다. 어떤 일에도 습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육체에도 물론 안된다.
.... 전쟁 발발전 습관, 정착, 사랑을 거부하려는 망명중의 라비크..
11.
어떤 일을 하려면 결과를 물어서는 안 되지. 그런 생각을 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자질구레한 일은 물어 보는 게 좋아요. 큰 일은 절대로 물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도 그렇군
여태까ㅑ지 당신이 사랑한 사람 중에서 당신을 버린 사람이 있었나?
있었지요.
사람은 언제나 상대를 버리게 마련인가 봐요. 때로는 상대가 이쪽보다 먼저 버리는 수도 있지요.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했찌?
별짓 다했지요! 별짓 다 했어요!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었어요. 전 아주 불행했어요
오랫동안?
1주일쯤요
길지는 않군
진실로 불행하면 1주일도 영원과 같아요. 전 몸도 마음도, 전부가 너무나 불행해서 1주일이 지나니까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어요. 저의 머리카락도, 피부도, 침대도, 제가 입는 옷까지도 불행했어요. 저는 온통 불행으로 가득 차 있어서 불행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어요. 불행밖에는 가진 것이 없게 되면 이번에는 불행이라는 것이 불행이 아니게 돼요- 불행과 비교해 볼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이라고는 완전한 허탈뿐이에요. 그것으로 끝장이 나지요. 슬슬 다시 살기 시작하지요.
13.
라비크. 당신이 하는 짓은 위험해요. 이런 칼바도스를 마시고 나면 다른 것은 절대로 마시지 못할 것 같아요
천만에, 다른 것도 마실 수 있어
하지만 전 언제나 이것을 생각할 거에요
좋지. 그렇게 되면 당신은 로맨티시스트가 될 거야. 칼바도스적 로맨티시스트가
그렇게 되면 다른 것은 맛이 없어질 게 아녜요?
정반대지. 다른 것까지도 제 맛보다 더 맛이 나게 되지. 다른 칼바도스를 동경하는 칼바도스가 된단 말야. 그것만으로도 칼바도스가 예사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지.
조앙은 소리내어 웃었다. 어리석은 소리 마세요. 다 알고 계시면서
물론 어리석을 소리지. 하지만 우린 그 어리석은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야. 진실이라는 말라 빠진 빵조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지.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라는 것은 어떻게 되지?
그것이 사랑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요?
대단히 많지. 영속적으로 관계가 있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단 한 번만 사랑을 할 뿐, 그 다음은 모든 것을 거절하게 될 거야. 그런데 자기가 버리는 사람 또는 자기를 버리는 사람에 대한 동경의 찌꺼기가 새로 나타나는 사람의 머리에 감도는 후광이 되는 거야. 이전에 누구를 잃은 적이 있다는 그 경험 자체가 새사람에게 일종의 로맨틱한 빛을 더하게 하는 거야. 이것은 후광을 가진 오래 된 환영이지.
그런말을 듣고 있으면 전 소름이 끼쳐요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 말 하면 싫어요. 농담이라두요. 기적을 요술로 바꾸어 버리는 짓이에요
15.
몇 시나 됐을까요?
5시쯤 됐어
5시. 3시면 어때요? 7시라도 좋구요. 밤에는 시간이 정지해서 움직이지 않아요. 움직이는 것은 시계뿐이에요.
그렇지. 그러나 모든 일은 밤에 일어나거든. 아니면 그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뭐가요?
낮이 되면 눈에 보이게 되는 것 말야
겁나게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자고 있는 동안에 미리 일어난다는 말씀이죠?
그렇지
왜 밤에 그렇게 될까요?
... 그것은 밤과 잠은 배반자이기 때문이야. 당신은 우리가 오늘 밤 서로 바싹 붙어서 잤다는 것을 알고 있지? 이마와 이마, 피부와 피부, 생각과 생각, 숨과 숨, 모두가 서로 닿고 섞여 있었어- 그러자 회색의 빛깔도 없는 잠이 우리 사이에 차차 스며들기 시작했거든- 처음에는 한두 개의 얼룩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윽고 수가 많아져서 우리의 생각에 딱지처럼 덮여서, 핏속으로 들어와, 무의식의 맹목을 우리들 속에 쏟아 넣는단 말이야- 그러면 갑자기 우리는 제각기 고독해지고, 외로이 어두운 운하를 어디론가 흘러 내려가고, 알지 못할 힘과 온갖 무형의 공포에 사로잡히는 거야. 나는 잠이 깼을 때 당신을 보았어. 당신은 자고 있었지. 당시은 아직도 먼 곳에 있었지. 나에게서 완전히 빠져 나가 있었지. 그리고 내게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어. 당신은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곳에 가 있었던 거야. 그는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밤마다 잘 떄, 당신을 잃어버린다고 한다면 그런 사랑이 어찌 완전하다 할 수 있을까?
전 당신에게 꼭 붙어서 잤어요. 당신 곁에서. 당신의 팔에 안겨서
당신은 알지 못할 나라에 가 있었어. 물론 당신은 내곁에 있었지. 그러나 당신은 시리우스 별보다도 더 먼 곳에 잇었어. 낮에 당신이 어디에 갔다 해도 그것은 문제가 아냐- 낮에는 나는 모든 것을 알고 ㅣㅇㅆ으니까. 그러나 밤에는 누구든지 아무것도 모르지
전 당신 곁에 있었어요
당신은 나와 함께 있지 않았어. 다만 내 곁에 누워 있었을 뿐이야. 제 맘대로 되지 않는 나라에서 어떻게 돌아올 수 있는 가를 그 누가 알겠어? 모르는 사이에 변하는 거야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나도 그렇지
당신이 잠을 깨서 잘 됐어요. 라비크, 달님에게 감사해야겠어요. 달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잠든 채로 서로 아무것도 몰랐을게 아녜요? 아니면 우리가 막을 길이 없는 사이에, 우리 중의 한 사람에게 이별의 씨앗이 뿌려져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되면 눈에 보이지 않게 점점 커져서 결국은 터져 나오게 되었을 테니까요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당신은 설마 그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겠지?
그래요. 당신은?
나도 그래. 그렇지만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있어. 그래서 우리는 진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야. 그것이 인간의 위대한 점이지
전 그런 건 무섭지 않아요. ...
우리 매일, 밤에 잠을 깨기로 해요, 라비크. 밤에 보는 당신은 낮에 보는 당신과는 달라요. 당신은 언제나 어딘가에서, 어딘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와요